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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던 대한제국 국새 찾았다..해외서 환수매입

사라졌던 대한제국 국새를 다시 찾았다.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하던 바로 그 국새로, 분실됐다가 이번에 처음 해외서 환수해왔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고종황제가 사용하다가 분실됐던 현존하는 유일의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국새를 17일 오전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에서 공개한다. 이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그 국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국새는 국외반출 중요우리문화재에 대한 유물구입을 통한 국외문화재 환수의 일환으로 지난해 12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 국새는 현재 외함(보록)은 분실되고 내함(寶筒?보통)만 남아 있는데 전체높이 4.8cm,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보뉴)는 거북형이며, 비단실로 짜여진 끈(寶綬?보수)이 달려 있다.

문화재청의 성분분석 결과 국새의 거북형 손잡이는 은(銀)과 금(金)의 비율이 81:18이며, 몸체(寶身?보신)는 57:41의 비율로 은이 많이 사용돼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사각형의 인장면에는 '皇帝御璽'라 양각돼 있다. 내함은 황동(黃銅)의 재질로, 2단으로 되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윗단에 국새를 넣는다.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의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감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덧붙였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번 국새 확인의 의미는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사진 등으로만 전해져 오던 국새의 실물이 확인됐다는 것과 국외반출된 우리 중요문화재를 구입을 통해 환수시켰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또 "국새가 찍힌 친서의 내용 중에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제국의 황제로서 주변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있어 대한제국기 연구에 핵심자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새의 글씨 중 황제의 "皇"은 "白"의 아래에 "王"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어새에서는 "自"의 아래에 "王"으로 표기됐다. 이외에도 고종친필의 비석이나 그 당시에 제작된 각종 비석군(碑石群), 어보(御寶), 의궤(儀軌) 등에서 확인되는 "皇"자는 모두 "自+王"으로 적어서 나타냈다. 고종황제가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통의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두 종류가 확인되고 있는데, 한 종류는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둥글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다른 한 종류는 1906년에 러시아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한 분위기이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있는 상태다.

이번에 확인된 국새에 대한 제작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 기록(광무5년 11월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 사이에 제작돼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국새는 공문서가 아닌 (공문서에는 "대한국새" "황제지보"등이 주로 사용됨)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향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이 국새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 지정신청을 하고, 적절한 시기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또한 덕수궁 석조전의 대한제국실이 복원되면 고종관련 자료 전시에 활용할 계획이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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